천에는 앞과 뒤가 있다.
그림은 하나의 매끈한 면처럼 보이지만, 캔버스는 사실 얇은 천 한 겹이다. 화가들은 이 천의 한쪽 면에 젯소 — 그림이 잘 앉도록 미리 발라 두는 흰 밑칠 — 를 입히고, 그 매끈하게 정돈된 면 위에 그림을 그린다. 반대편,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거친 뒷면은 늘 벽을 향한 채 우리 눈에 닿지 않는다.
강민석 작가가 하는 일은 말해 주지 않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는 완성된 그림을 통째로 돌려세우는 것이 아니다. 캔버스 틀은 그대로 둔 채, 천을 뒤집어 — 젯소가 발리지 않은 그 거친 뒷면, 아사천의 생면 위에 — 그림을 그린다. ⟨Reversed Boundary⟩, 역전된 경계. 다섯 번째 노트는 1밀리미터 남짓한 천 한 겹을 사이에 둔 그 뒤집기가 실제로 무엇을 뒤집고 있는지, 한 겹 더 들어가 본다.
두 개의 세계, 그리고 그 사이의 얇은 막
강민석에게 이 천의 두 면은 그저 앞뒤가 아니다. 젯소를 발라 우리가 흔히 그림을 그리는 매끈한 앞면 — 그것은 현실이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정돈되고 다듬어진 세계. 그리고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거친 뒷면 — 그것을 작가는 자신의 정신세계로 읽는다. 손대지 않은, 다듬어지지 않은, 마음 안쪽의 공간.
그렇다면 그 사이에 놓인 얇은 천 한 겹은 무엇인가. 작가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그것은 “지구와 우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단단히 딛고 선 작은 현실(지구)과, 그 바로 뒤에 펼쳐진 캄캄하고 광대한 내면(우주)을 가르는 동시에 잇는, 겨우 1밀리미터 남짓한 얇은 막. 앞으로 한 걸음이면 현실이고, 그 천 한 겹을 넘으면 정신의 공간이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1957)에서 이런 안쪽의 공간을 ‘내밀한 무한(intimate immensity)’이라 불렀다. 그는 몽상이 “우리를 눈앞의 세계 밖으로, 무한의 표식을 지닌 세계로 데려간다”고 썼다. 무한은 저 바깥 우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쪽에도 있다는 것 — 눈을 감고 무언가를 떠올리는 순간, 마음은 어떤 바깥 풍경보다 넓어진다. 다만 바슐라르가 몽상 속에서 그 안쪽의 무한을 떠올렸다면, 강민석은 천 한 겹을 실제로 넘겨 그 무한의 면 위에 손을 얹는다. 상상으로 여는 문을, 그는 물감과 천으로 연다.

정신세계의 언어
그 뒷면에 그려진 세계는 우리가 아는 그림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오래도록 강민석의 화면을 달리던 자동차는, 여기서 형체를 거의 잃는다. 왜곡되고 또 왜곡되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기 힘들 만큼 반복되는 형태. 그 사이사이에는 규칙을 지닌 기호들이 되풀이되고, 어떤 화면에는 검은 둥근 공간이 뚫려 있다.
이 세계의 성질을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 정신세계란 불안정하고, 공중에 붕 떠 있으며, 무엇 하나 또렷하지 않은 복잡한 관계들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불안정함 한가운데에 안정된 패턴들이 자리 잡는다. 흔들리는 것 속에서 스스로 질서를 세우는 무늬. 완전한 혼돈도, 완전한 질서도 아닌 상태 — 그것이 마음의 실제 모습에 더 가깝다. 정돈된 현실의 앞면이 미처 담지 못하는 그 어긋남과 반복을, 강민석은 다듬지 않은 뒷면에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이 한 점에서 시작한다
이 모든 왜곡과 반복에도 출발점이 있다. 원근법을 배울 때 가장 먼저 찍는 그 하나의 점 — 소실점처럼, 강민석의 화면도 한 점에서 시작해 뻗어 나간다. 그런데 그 점이 누구인가. 작가는 분명히 말한다. 그 시작점은 자기 자신, 바로 작가라고.
현실도 정신세계도 결국 한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내가 보는 세계도 나에게서 시작되고, 내 안의 우주도 나에게서 시작된다. 그래서 이 연작은 자동차 그림이 아니라, 한 점에서 두 세계로 뻗어 나가는 ‘나’에 대한 지도에 가깝다.
그리고 화면에 뚫린 검은 둥근 공간 — 작가는 그것을 블랙홀이라 부른다. 이 정신의 세계로 들어오기 위한 입구다. 현실의 앞면에서 뒷면의 우주로 건너가려면, 우리는 그 캄캄한 구멍을 통과해야 한다. 천 한 겹을 넘는다는 것은, 그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 자기 안쪽으로 떨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바라보는 일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강민석 자신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는 자기 마음의 뒷면으로 건너가, 거기서 자기 자신을 마치 남을 보듯 — 3인칭으로 — 바라본다. 심리학에서 ‘메타인지’라 부르는, 나를 한 발짝 떨어져 보는 시선. 캔버스의 뒷면은 그가 자신을 관찰하기 위해 건너가 서는 자리인 셈이다.
그래서 이 연작은 또렷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정신세계에 정답이 없듯, 이 그림도 “이것이 정답”이라 말하지 않는다. 다만 가만히 묻는다. 매끈하게 다듬어 남에게 보이는 앞면 말고, 당신에게도 한 번도 넘겨 본 적 없는 거친 뒷면이 있지 않으냐고. 그 뒷면에도 알아보기 힘들게 왜곡된 형태와, 자꾸 되풀이되는 기호와, 불안 속에서도 스스로 세운 무늬가 있지 않으냐고.
자동차를 그려 온 화가가 천을 넘겨 자기 정신의 뒷면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 이것은 소재의 확장이 아니라 시선의 회전이다. 달리는 것을 그리던 사람이, 이제 달리는 자신의 안쪽으로 건너간다.
다음 노트 ⟨강민석 읽기 No.6⟩은 한때 화면을 가로지르던 ‘실’의 시간으로 건너간다 — ⟨Timeleap⟩과 한 땀의 시간론이다.

참고 자료
· 강민석, ⟨Reversed Boundary(역전된 경계)⟩ 시리즈 노트 — minseok.gallery ·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La Poétique de l'espace)』, 1957 — ‘내밀한 무한(intimate immensity)’: 우리 안쪽에 펼쳐지는 무한의 공간
이 노트의 도판은 강민석 작가의 작품이며 © MINSEOK Studio. 저작권이 살아 있는 외부 작가의 작품은 도판으로 싣지 않고, 도판은 강민석의 작품과 퍼블릭 도메인 작품만 사용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