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석 Minseok Kang — 자동차 회화 작가 portrait

강민석 · Minseok Kang

자동차 회화Automotive Fine Art

속도로 그린 현대인의 초상

나는 자동차를 그리는 화가다.

하지만 내 캔버스에서 자동차는 한 번도 기계였던 적이 없다. 자동차는 나를 대신해 달리고, 흔들리고, 길을 잃고, 멈춰 서는 존재다 — 나는 자동차의 형상을 빌려 인간을 그린다.

자동차의 형태가 일그러지고 해체되는 순간마다 나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속도의 시대를 달리는 현대인의 정체성, 멈추지 않는 변화,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전환. 형태가 무너지는 것은 파괴가 아니라 성장이다 — 나는 자동차라는 하나의 형상을 통해 시간과 내면, 존재의 여러 얼굴을 본다.

작가 소개 · About

나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화가가 되는 것 말고 다른 꿈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입시를 지나며 손은 자유로워졌고, 동아대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나는 나를 드러내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성적인 아이였다. 그림만이 내가 세상에 말을 거는 방식이었다.

그 무렵 나는 도시를 추상으로 그리고 있었다. 어느 날, 화면 한 귀퉁이에 작은 자동차 이미지를 콜라주했다. 우연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거리에는 언제나 자동차가 있었다. 어디론가 가고 있었고, 멈추었고, 규칙에 따라 움직였다. 나는 그것들을 조금씩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자동차에는 방향이 있다. 속도와 질주는 시간을 품고 있다. 차체 바깥의 풍경은 환경과 공간을 말해 준다. 그리고 자동차는 나보다 강한 존재였다. 외형은 아름다웠고, 그 아이콘은 강력했다. 나는 그 존재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대신, 그것을 빌려 내면의 힘을 — 나를 —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어느새 나는 경쟁이라는 삶에 빠져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경쟁자와 그림으로 경쟁한다는 것. SNS도 없던 시절이었다. 개성이 강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자주 존재감을 잃었다. 나라는 존재가 흐려질 때, 나에게는 대상이 필요했다 — 무의미한 것이라도. 어떤 성과가 필요했다. 그때는 그것이 돌파구였다. 그 시간을 지나며 자동차는 점점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자동차는 터널을 지나 새로운 공간으로 넘어간다. 꿈같은 일이다. 변화하니까.

나는 실패를 많이 했다. 그래서 늘 두렵다. 실수가 싫어서 신중하고, 또 신중하다. 그런데도 실수와 실패는 거듭되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디지털로 수십 번을 고치고, 매일 들여다보며 상상했다. 그런다고 실수가 줄지는 않았다. 답은 내가 정한다고 생각했다. 나만의 고집이었다. 나에게만 보이는 흔적들이 쌓여 갔고, 어느 순간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데까지 왔다. 깊은 우울이 왔다. 그것을 통과하기 위해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기는 몸을 일으켰고, 몸은 마음을 일으켰다. 그 힘이 그림에서 분출되기 시작했다. 알아보기 힘들 만큼 응축된 형상들 — 내면의 폭발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면과 본격적으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수긍하고, 타협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기법은 그림 속에 스며들게 한다. 기술이 앞에 나서면 이야기가 묻힌다. 자동차를 그리되 형상을 왜곡하거나, 그 아름다움만을 붙잡는다. 재료에 규칙은 없다. 스퀴지로 밀다가도 언제든 붓을 들 수 있고, 실을 꿰맬 수도, 오브제를 붙일 수도 있다. 아이스크림 조형과 미디어아트 역시 시대 속에서 내가 흡수할 수 있었던 매체에 개념과 철학을 갖춰 기획한 프로젝트다. 이상향을 향해 뻗은 강한 줄기가 있다면, 사막과 길 잃은 레이서와 뒤집힌 천은 그 사이에 돋은 잔뿌리다. 이어지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나의 그림은 현대인과 맞물려 있다. 경쟁과 성공, 실패, 분노, 정체성, 꿈. 나는 자동차라는 가면을 쓰고 이야기할 뿐이다. 화려하고 강한 힘이 응축된 그 형상은, 누구에게나 내면에 있는 응축된 자기 자신의 본모습이다. 나의 그림은 누군가를 위로하지 않는다. 색과 형태, 폭발, 분노 — 강렬한 내면의 응축이다. 그것이 그림이라는 매체로 관객에게 다가가는 이유이고,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힘이 된다.

나는 2년에 한 번씩 개인전을 연다. 경쟁은 이제 나 자신과의 대화다. 어딘가에 도착하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지속할 수 있는 삶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한계에 닿으면 돌파구를 찾는다. 운명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아니라 — 더 큰 이상향의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CV

아크릴과 스퀴지로 밀어낸 회화, 시간을 실로 꿰맨 캔버스, 뒤집힌 천의 생면에 그린 정신세계, 수채로 옮긴 클래식카까지 — 아래의 시리즈들은 하나의 질문이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진화해 온 기록이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은 나 자신이다. 각 시리즈에서 작품과 작가노트를, 연재 ⟨강민석 읽기⟩에서 이 세계의 깊이를 읽을 수 있다.

Original Painting — 강민석 자동차 회화 대표작Original Painting

작가의 생각

자동차를 그리지만, 그걸 그저 '자동차 그림'이라 부르기엔 무언가 더 있어 보인다. 당신의 작업을 어떻게 소개하겠나?
나는 자동차를 그리지만, 화면에서 말하려는 것은 한 번도 자동차였던 적이 없다. 내가 붙드는 것은 속도인데, 여기서 속도는 '빠르다'는 감각이 아니라 시간이다. 스퀴지로 물감을 밀어낼 때 화면에 남는 것은 달려간 거리가 아니라 지나가 버린 시간의 흔적이고, 그래서 화면에 남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시간이다. 자동차 회화라는 형식을 빌렸을 뿐, 내가 정작 그리는 것은 그 속도를 통과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자동차인가. 다른 소재도 많은데, 굳이 자동차여야 했던 이유가 있나?
자동차에는 하나의 본능이 있다. 앞으로만 향하려는 힘, 멈추는 법을 모르는 질주의 충동, 목적지를 묻지 않고 속도 자체에 몸을 던지는 맹목 같은 것이다. 나는 그 기계적인 본능을 인간의 내면 바로 앞에 세워 둔다. 우리 안에도 자꾸만 앞으로 밀고 나가려는 충동이 있고, 동시에 그 질주가 어디로 향하는지 몰라 불안해하는 마음이 있다 — 나에게 작업은 그 둘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러니 자동차는 내가 그리려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안의 속도와 벌이는 싸움을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속도와 자동차를 다룬다는 점에서 20세기 초 미래주의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신의 작업은 미래주의와 어떻게 다른가?
겉으로는 닮아 보여도, 향하는 곳은 정반대다. 미래주의는 기계와 속도를 찬양했다 — 더 빠른 것이 더 아름답다고 믿었다. 나는 그 반대편에 선다. 이 시대는 이미 '더 빨리'를 강요하고, 나는 그 속도를 숭배하지 않는다. 다만 부수지도 않는다. 나는 속도를 통과해, 그 속도가 지워버린 것 — 인간의 내면과 지나온 시간 — 을 되찾으려 한다. 그러니 내 화면에서 형태가 해체되는 것은 파괴가 아니라 드러냄이다. 미래주의가 기계를 향한 찬가였다면, 나는 그 질주 한복판에서 인간을 되찾으려 한다.
작업 방식이 독특하다. 붓이 아니라 스퀴지로 물감을 긁어낸다고 했다. 작업실에서 그 순간은 실제로 어떤 감각인가?
스퀴지로 아크릴 물감을 밀어내는 순간은 늘 조금 서늘하다. 한 번 지나가면 결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밀어낸 자리 아래로 먼저 칠했던 색이 언뜻 비쳐 올라올 때가 있는데, 나는 그렇게 겹쳐 쌓인 층을 '기억'이라 부른다. 손끝에 전해지는 물감의 저항감, 순식간에 끝나 버리는 그 짧은 긴장 안에는 무언가가 통과했다가 사라지는 시간이 통째로 눌려 있다. 그래서 나는 한 획을 긋기 전에 오래 망설이고, 긋고 난 뒤에는 그 자국을 다시 오래 들여다본다.
작업은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변해 왔다. 2년 전만 해도 캔버스에 자수실을 얹었는데, 지금은 그것마저 걷어내고 오직 스퀴지만으로 그린다. 왜 계속 덜어내나?
내 작업은 시대와 함께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한다. 그 변화 자체가 내가 그리려는 그림이다. 한때는 자수실로 규칙과 관계의 선을 얹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걷어내고 오직 스퀴지 하나로 화면을 민다. 덜어낼수록 더 정직해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림은 내 고민의 시계가 걸려 있는 시간이다. 나이가 들며 생각은 바뀌고, 타협하고 설득하고 서로 부딪혀 교차한다. 그 안에는 여전히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두려움과, 그 두려움을 통과하며 겪는 여러 고통이 있다. 나는 그 흔들림을 숨기지 않고 화면에 남긴다 — 한 사람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변해 가는가, 그것이 내 그림이 끝내 하는 이야기다.
작업이 갈수록 형태가 무너지고, 자동차를 알아보기 어려운 추상으로 나아간다. 왜 굳이 형상을 허무는가? 그리고 그 자리에서 관객은 무엇을 보게 되는가?
나에게 왜곡은 파괴가 아니라 성장이다. 형태가 무너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오히려 정체성이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자동차의 윤곽이 선명할수록 사람들은 '저건 자동차구나' 하고 멈춰 버리지만, 형상이 흩어질수록 관객은 그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무엇을 그렸는지 또렷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의 경험과 불안을 그 빈자리에 끌어와 채운다. 나는 그렇게 떠오르는 얼굴이 결국 현대인의 초상이라고 믿는다 — 앞으로만 내몰리는 속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우리 모두의 내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작업을 직접 만나 보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 그리고 이 모든 질주 끝에, 끝내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
원화는 물감층의 두께가 화면 앞에 직접 서야 비로소 보이기 때문에, 실제 작품이 궁금한 분은 이메일로 문의를 주시면 된다. 원화는 Artsper, 사치아트, 싱귤라트, 아트마쥬르 같은 해외 아트 플랫폼을 통해서도 세계의 컬렉터를 만난다. 그리고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MINSEOK®'이라는 상표로 등록한 포스터 브랜드를 따로 세웠다 — 수채화 자동차 연작을 아트 포스터로 옮겨, 아마존에서 미국·캐나다·영국·독일 네 나라에 선보인다. 어떤 형태로 만나든 내가 바라는 것은 한 가지다. 그 앞에서 잠시 멈춰, 자기 안의 속도와 그 속도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것. 기계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달리지만, 인간은 그 속도 한복판에서 '나는 대체 무엇인가'라고 되묻는 존재다. 결국 나의 작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하나의 물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향해 긁고 겹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