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닥 위, 먼지만 남기고 숲으로.
⟨Stray Racer(길 잃은 레이서)⟩ 앞에 서면, 먼저 발밑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자동차가 달리는데, 도로가 없다. 아스팔트도, 흙길도, 심지어 땅의 선조차 그려져 있지 않다. 자동차의 바닥은 화면과 똑같은 흰빛이어서, 차는 어딘가에 얹혀 있다기보다 허공에 붕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길이 사라진 자리에서, 그런데도 자동차는 분명히 움직이고 있다. 무엇이 그렇게 말해 주는가. 차 뒤로 길게 흩어지는 한 줌의 먼지다. 강민석은 길을 지우는 대신, 지나간 자리의 흔적만 남겨 둔다. 갈 곳은 보이지 않아도, 방금 무언가를 지나왔다는 사실만은 남긴 것이다.
그 자동차는 늘 한 방향을 향해 있다. 숲이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쪽으로, 작은 차 한 대가 코를 들이밀고 있다. 숲은 편안한 목적지가 아니다. 어둡고, 깊고, 안이 보이지 않는다. 강민석에게 그 숲을 향하는 일은 두려움인 동시에 도전이다. 그는 남들이 이미 닦아 놓은 반듯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삶도 생각도 저마다 다른데, 가고자 하는 길이라고 같을 리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저 안이 어떤 숲일지 알 수 없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또 하나의 모험이다.

이것은 꿈이다 — 출구가 없는 숲.
지난 노트에서 우리는 '상상의 사막'에서 손으로 물감을 칠하며 그 지옥을 걸어 나온 사람을 보았다. 그렇게 걸어 나온 그가, 이번엔 길 위에 선다. 그런데 그 길마저 지워져 있다.
강민석은 이 그림들이 꿈에서 왔다고 말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숲이 아니라, 잠 속에서 반복해 찾아오는 가상의 숲이다. 그의 꿈은 늘 같은 장소를 되풀이하는 미로 같은 곳이다. 그는 현실에서 어떤 '답'을 찾고 싶어 했고, 그 답을 향한 헤맴이 꿈속에서도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낮 동안 풀지 못한 물음이 밤이 되면 숲의 형상으로 돌아와, 같은 자리로 그를 데려다 놓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숲이 언제나 똑같지는 않다. 헤매다 보면 새로운 숲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빠져나왔다 싶으면 또 다른 나무들이 앞을 막고, 길인 줄 알고 들어선 곳이 다시 처음이 된다. 사실 이 이야기에는 출구가 없다. 강민석은 그 점을 숨기지 않는다. 답에 도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답을 찾아 무한히 도는 이야기라는 것. 그 초록의 미로 한가운데를 달리는 작은 자동차는,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약속대로, 강민석 자신이다. 아니, 그 앞에 선 관객이기도 하다.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작가가,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우리가 함께 있다.

출발점 하나 — 마그리트의 숲을 지나온 자리.
이 시리즈에는 분명한 출발점이 하나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백지위임장(Le Blanc-seing)」이다. 숲을 배경으로 말을 탄 인물이 나무들 사이를 지나가는데, 그 공간의 논리가 불가능하게 뒤틀려 있는 그림이다. 말과 기수의 어떤 부분은 나무 앞에 있고, 어떤 부분은 나무 뒤에 있다. 마땅히 가려져야 할 숲의 영역이 오히려 앞으로 튀어나온다. 앞과 뒤, 안과 밖의 위계가 무너져, 보는 사람의 눈은 저 인물이 가까이 있는지 멀리 있는지 끝내 정하지 못한 채 앞뒤로 미끄러진다. 강민석은 이 그림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것을 자기 이야기로 다시 풀었다.
다만 그는 마그리트의 역설을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 마그리트의 화면이 가만히 선 관객의 눈을 끝내 헷갈리게 하는 '정지된 수수께끼'라면, 강민석은 그 역설을 '움직이는 자'의 문제로 바꾼다. 마그리트의 기수는 말 위에서 조용히 나아가지만, 강민석의 레이서는 속도와 방향을 가진 자동차로 같은 숲을 무한히 반복해 돈다. 눈에 보이는 길이 정말 통과할 수 있는 길인지 알 수 없다는 마그리트의 공간, 그 위를 한 대의 차가 실제로 달려 보는 것이다. 가만히 멈춰 있던 수수께끼가, 시간과 반복과 선택의 이야기로 옮겨 앉는다.
곧은 길을 잃고 — 우울의 시기.
강민석은 이 시기가 우울증의 시기였다고 담담히 밝힌다. 예술가라는 직업은 개인의 생각과 생존에 대한 걱정을 안 할 수 없고, 그 걱정이 곧 불안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그림들은 결국 '방향'에 관한 그림이라고 그는 말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던 시절, 그 방향의 상실이 출구 없는 숲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칠백 년 전, 단테도 꼭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신곡』 지옥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 '우리 인생길의 한가운데에서 / 나는 어두운 숲속에 있었으니 / 곧은 길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라'. 인생의 한복판에서 곧은 길을 잃고 어두운 숲에 갇힌다는 이 첫 세 줄이, 방향을 잃고 미로 같은 숲을 헤매는 강민석의 레이서와 그대로 겹친다. 다만 두 숲은 끝이 다르다. 단테의 어두운 숲은 통과해야 할 관문이다. 안내자를 만나고, 지옥과 연옥을 거쳐, 끝내 빛으로 나아가는 상승의 서사가 그 숲에서 시작된다. 강민석의 숲에는 안내자도 목적지도 없다. 풀리지 않은 물음이 같은 자리로 자꾸 데려가는 되풀이되는 꿈처럼, 그의 숲은 아직 답을 미뤄 둔 채 맴도는 정지의 자리에 가깝다.
그래서 'Stray'라는 제목은 한 가지 뜻으로 읽히지 않는다. 누구에게 그것은 길을 잃음이고, 누구에게는 무리에서 벗어난 자, 소외된 자(outcast)의 이름이다. 강민석은 그 두 뜻을 다 품은 채, 남이 간 반듯한 길을 일부러 택하지 않는다. 길을 못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길을 찾겠다는 쪽에 가깝다.

나무를 닮은 기둥 하나, 그리고 끝나지 않는 꿈.
헤매던 숲의 어느 지점에서, 뜻밖의 형상이 나타난다. 나무를 상징하는 기둥이다. 신전이나 르네상스 그림에 나올 법한 매끈한 원기둥이, 거친 숲 한가운데 홀연히 서 있다.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강민석은 그것을 하나의 암시라고 말한다 — 정답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와 그에 대한 희망 같은 것. 출구를 알려 주는 표지가 아니라, '여기서 무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작은 신호다. 능숙한 레이서, 어떤 전문가라 해도 길을 잃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길 잃음은 실패가 아니라, 나의 길을 찾겠다는 의지와 같은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이 심리의 결은 화면의 물성에도 배어 있다. ⟨Stray Racer⟩ 시기의 여러 작품은 캔버스 위에 레이저로 인쇄한 종이를 열로 전사하고, 그 종이를 뜯어내며 만든 것이다. 떨어져 나간 자리와 붙어 남은 자리 사이를, 아크릴 물감을 수채화처럼 물려 오래 자연 건조시킨다. 뜯긴 흔적과 번진 물감이 뒤섞여,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풍경이 된다. 붙지 않은 부분은 두꺼운 물감으로 형상을 다시 세우거나 가상의 공간으로 연출한다. 그리고 유독 자주 등장하는 것이 선인장이다. 숲이되 가시가 돋친 숲 —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그 시절의 큰 상처와 두려움이었다고 강민석은 말한다. 가장 사랑받은 선인장 연작 앞에서, 관객은 초록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숨은 가시를 동시에 만난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꿈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오늘도 흰 바닥 위에 먼지를 남기며 숲으로 향하고, 새로운 숲이 또 나타날 것이다. 다음 ⟨강민석 읽기 No.9⟩ ⟨바람에 흔들리다(Sway in the Wind)⟩는, 그 숲을 달리는 레이서에게 이번엔 강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야기다. 방향을 잃은 자에게, 이제 밀어붙이는 힘까지 더해진다. 흔들리면서도 멈추지 않는 자동차가, 그 바람 속에서 어디로 향하는지를 다음 노트에서 읽는다.

참고 자료
· 강민석 작가노트 — ⟨Stray Racer(길 잃은 레이서)⟩ 시리즈, 2015~2017 · minseok.gallery ·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백지위임장(Le Blanc-seing / The Blank Signature)」, 1965 — 작가가 밝힌 출발점. 숲을 배경으로 말과 기수의 앞뒤가 불가능하게 뒤엉키는 공간의 역설. ·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신곡』 지옥편 제1곡 1~3행 (지옥편 약 1308~1314년경 집필, 전체는 1320년경 완성) — '어두운 숲(selva oscura)'과 '잃어버린 곧은 길(diritta via)'. · 되풀이되는 미로(labyrinth)의 꿈에 관한 통상적 해석 — 미해결의 과제로 같은 자리를 맴도는 상태.
저작권 고지: 마그리트·단테 등 외부 작가의 작품은 텍스트로만 인용했으며 도판을 게재하지 않았다. 본문에 실린 도판은 모두 강민석의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