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에는, 모두가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
2020년의 이야기다.
그해 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코로나19가 시작됐다. 도시가 조용해졌고, 사람들은 문을 닫았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 더 이상 각자의 선택이 아니게 되었다.
강민석은 그해에 숲을 그렸다. 정확히 말하면, 숲으로 불어닥친 바람을 그렸다.
그는 시대를 화면 안으로 들여놓기를 좋아하는 화가다. 아이스크림을 빚을 때도, 실로 시간을 꿰맬 때도 그랬다. 그러니 세계가 문을 닫은 해에 그가 무엇을 그렸는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기록이 된다. 그가 그린 것은 바람이었다. 아주 강한 바람.
⟨바람에 흔들리다⟩는 열한 점으로 이루어진 연작이다. 2020년, 캔버스에 아크릴. 그리고 이 연작에는 그의 이전 작업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화면을 지배하는 것이 자동차가 아니라는 것.
그가 늘 있는 자리.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이 숲은 지도에 있는 숲이 아니다.
강민석의 숲이다. 지난 이야기에서 레이서가 헤매던 그 우거진 숲과 같은 곳이고, 그는 늘 거기에 있다. 그는 나무와 숲을 좋아한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숲은 그에게 가장 안전한 자리, 마음이 놓이는 자리다. 그의 작업실이 그렇고, 집이 그렇다.
그러니까 이 연작은 그가 가장 편안한 자리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자리로 태풍이 들어온다.
⟨Sway in the Wind V⟩에서는 가로로 긴 화면의 4분의 3을 검푸른 숲이 차지하고, 그것이 파도처럼 한쪽으로 휘어져 내려온다. 아래쪽 흰 여백에 하늘색 자동차 한 대가 있다. 작다. 아주 작다. 덮쳐오는 것과 덮쳐지는 것의 크기 차이가 이 그림의 전부다.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자리에서 태풍을 만나는 일. 2020년에 수많은 사람이 겪은 것이 정확히 그것이었다. 집이 가장 안전한 곳이면서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곳이 되던 경험. 피난처와 감옥이 같은 주소를 쓰던 시절.
숲은 그의 자리였다. 그러나 바람은 그가 부른 것이 아니다.

멈춘 것처럼 보이지만.
⟨Sway in the Wind VI⟩는 한 변이 33.5센티미터인 작은 정사각형이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조금도 작지 않다.
화면 왼쪽 위에 흰 자동차가 한 대 있다. 나머지는 전부 움직임이다. 크림과 주황과 노랑이 뒤엉킨 거대한 띠가 화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고, 검푸른 덩어리가 그 둘레를 에워싼다. 그 위로 흰 선들이 사방으로 그어진다. 바람이다.
처음 보면 자동차가 멈춰 있는 것 같다. 폭풍 앞에서 어쩌지 못하고 붙들려 있는 것처럼.
그러나 강민석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저 자동차는 달리고 있다. 그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계속, 있는 힘껏 달리고 있다. 다만 주변의 힘이 너무 강해서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 말을 듣고 나면 그림이 달라 보인다. 이것은 포기한 사람의 그림이 아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제자리인 시간을 그린 그림이다. 그해에 많은 사람이 그랬다. 매일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나아가지 않는 것 같던 시간.
한 가지가 더 있다. 이 화면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하늘의 자리에서 숲과 길과 자동차를 본다. 그의 그림에서 늘 그랬듯 저 자동차는 강민석 자신이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가 달리는 모습을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셈이다. 무력감은 자주 그런 시점으로 찾아온다. 상황 한복판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상황을 멀리서 내려다보게 되는 것.
이 화면 앞에서는 오래된 소설 한 권이 떠오른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전염병 때문에 도시 하나가 통째로 봉쇄되는 이야기이고, 2020년에 전 세계에서 다시 팔린 책이기도 하다.
그 소설에서 가장 오래 남는 인물은 영웅이 아니다. 리유라는 의사다. 도시가 닫히고 사람들이 무너지는 동안 그는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다. 그저 매일 자기 환자를 보러 간다. 병이 물러갈 기미가 없어도, 오늘 한 일이 내일 표가 나지 않아도.
강민석의 자동차가 하는 일이 그것이다. 나아가지 못하는데도 계속 달린다. 달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달리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태풍의 한가운데.
작가노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적혀 있다. "두려움과 희망이 교차하는 순간, 나는 숲 한가운데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태풍에는 눈이 있다. 소용돌이가 가장 사나운 그 한복판에, 바람이 잦아드는 자리가 생긴다. 잠시 하늘이 보이고 조용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태풍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잠깐 숨을 쉴 수 있다는 뜻일 뿐이다.
이 연작이 두려움만의 기록이 아닌 이유가 거기 있다. 두려움 옆에는 늘 희망이 붙어 있고, 그 둘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사람은 숨을 고른다. 그리고 다시 달린다.
돌아선 자리.
⟨Sway in the Wind X⟩ 앞에 서면 지난 노트의 그림이 겹쳐 보인다.
흰 바닥, 세로로 늘어선 기둥들, 그 사이로 열린 흰 통로, 그리고 아래쪽에 놓인 작은 청록색 밴 한 대. 구도도 분위기도 지난 이야기의 숲과 같다.
우연이 아니다. 강민석은 두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기에, 새로운 시즌으로 넘어간다는 뜻으로 같은 형식을 한 번 더 썼다고 말한다.
다만 두 가지가 다르다.
하나는 방향이다. 지난 이야기의 차는 뒷모습이었다. 저쪽으로 멀어져 가는 모습. 이 그림의 밴은 앞모습이다. 앞쪽을 보고 서 있다.
다른 하나는 색이다. 화면 전체에서 색이 한 겹 빠져 있다. 짙은 초록이 옅어지고, 그 자리에 흰빛이 올라온다.
강민석은 이 그림을 전환점이라고 부른다. 멀어지던 것이 돌아서고, 색이 한 번 가라앉는 자리. 이야기가 방향을 바꾸는 지점은 대개 그렇게 생겼다.
그리고 안에서 벌어지는 일도 다르다. 지난 이야기에서 그를 붙든 것은 자기 안의 물음이었다. 답을 찾지 못한 사람의 머릿속이 밤마다 지어 올린 미로. 이번에 그를 붙든 것은 밖에서 불어온 바람이다. 같은 숲, 다른 이유.

화면 너머의 자유.
연작의 마지막 화면은 전혀 다른 세계다.
⟨Sway in the Wind XI⟩는 세로로 선 화면이다. 초록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린다 — 물감이 실제로 흘러내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화면 가운데가 하얗게 열리고, 그 빛 속에 야자수가 서 있다. 파란 밴 한 대, 그리고 두 사람이 빛을 향해 걸어간다.
이 그림에는 출처가 있다. 자유가 사라져 가던 그해, 강민석은 서핑하는 사람들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바다로 나갈 때의 설렘, 파도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자유. 문밖으로 나갈 수 없는 자리에서, 화면 너머로 건너다본 자유였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강민석은 그림에 사람을 넣지 않는 화가다. 자동차가 사람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화가의 오래된 원칙이었다.
그런데 이 연작에는 사람이 있다. 딱 한 번, 갈 수 없는 곳을 그린 그림 안에만. 그것도 아주 흐릿하게.
흐릿함은 미완성이 아니다. 그 자유가 자기 손에 닿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면 너머에 있고, 남의 것이고, 지금은 갈 수 없는 것. 강민석은 그 거리를 형태로 옮겼다. 사람을 그리되, 알아볼 수 없을 만큼만.
갈 수 없게 된 사람이 낙원을 그린 일은 미술사에도 있다. 앙리 마티스는 일흔이 넘어 큰 수술을 받고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붓을 오래 들기 어려워지자 그는 침대에서 색종이를 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든 화면 가운데 「폴리네시아, 바다」가 있다. 물고기와 새와 해초가 떠다니는 푸른 바다 — 젊은 시절 한 번 다녀온 타히티의 빛과 물을, 기억만으로 되살린 것이다.
몸이 방에 묶인 채 만들어 낸 남국. 강민석의 마지막 화면도 같은 자리에서 나왔다. 다만 마티스가 기억에서 꺼냈다면, 강민석은 화면 너머로 건너다보았다.
벗어날 수 없을 때 사람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상상이다. 그리고 그 상상은 대개, 남이 누리는 자유를 건너다보는 데서 시작된다.

태풍은 자로 그을 수 없다.
⟨바람에 흔들리다⟩에는 스퀴지가 없다. 실도 없다. 붓이 물감을 두껍게 얹었고, 어떤 곳에서는 묽게 풀어 흘려보냈다.
강민석은 이 연작에서 중요한 것은 기법이 아니라 이야기라고 잘라 말한다. 그렇다면 왜 붓인가. 답은 어렵지 않다. 태풍은 자로 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연작은 그의 작업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그렇게 말한다. 열한 점, 한 해. 긴 목록에서 보면 짧은 대목이다.
다만 이 짧은 대목에서 무언가가 바뀌었다. 코로나19는 몇 년 동안 이어졌고,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 시간을 지나면서 그의 중심 연작 ⟨끝없는 힘⟩에 전환점이 왔다. 밴이 돌아서고 색이 한 겹 가라앉던 그 화면처럼, 큰 이야기도 그 무렵 방향을 바꿨다.
그러니까 이 열한 점은 큰 연작이 아니라, 큰 연작이 방향을 바꾸기 직전에 지나온 자리다. 태풍의 한가운데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자리.
그리고 그 자리는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그해에 창밖을 내다보던 사람들이 모두 거기에 있었다. 멈춰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각자 있는 힘껏 달리고 있었다.
참고 자료
⟨바람에 흔들리다 Sway in the Wind⟩ 연작 11점, 2020, 캔버스에 아크릴. 작가 노트 및 2026년 8월 작가 구술.
알베르 카뮈, 『페스트』(1947) — 전염병으로 봉쇄된 도시 오랑을 배경으로, 영웅이 아니라 자기 일을 묵묵히 계속하는 의사 리유를 중심에 둔 소설.
앙리 마티스의 색종이 작업 — 1941년 큰 수술을 받고 몸을 움직이기 어려워지자 시작한 방식. 「폴리네시아, 바다」(1946)는 여러 해 전 타히티에서 본 빛과 바다를 기억만으로 되살린 화면이다.
태풍의 눈 — 큰 태풍의 한가운데에 생기는, 바람이 약해지고 하늘이 열리는 자리. 태풍이 끝났다는 신호가 아니라 한복판을 지나는 중이라는 신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