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볼 때는 빛이었다.
2012년 홍콩의 밤에 강민석은 강 건너에서 도시를 보았다. 지난 노트에서 읽은 그림들이 거기서 나왔다. 길이 없는 하늘로 자동차를 띄웠고, 바다를 건넜고, 저 앞의 붉은 도시를 향해 갔다.
2년 뒤에 그는 그 도시 안에 있다.
⟨긴 여정⟩은 2014년에 시작해 2015년에 끝난 연작이다. 열한 점. 배경은 뉴욕 타임스퀘어다. 세상에서 가장 밝다는 곳.
그런데 화면이 검다.
붉은 미등 몇 개와 노란 간판 몇 조각이 남았을 뿐, 건물들은 어둡게 뭉개져 있다. 위에서는 흰 물감이 길게 흘러내려 도시를 지우고 있다.
멀리서 보던 빛은 여기에 없다.

도착이 끝이 아니었다.
바라볼 때 그것은 이상향이었다. 화려하고 웅장한 꿈의 공간.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냥 현실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이 시기를 그는 우울의 시기라고 부른다.
그 몇 해 동안 그는 자기 자신을 파고들고 있었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 물음을 따라가다 보니 상상과 이상향이 한계에 닿았고, 그 끝에서 현실과 부딪혔다. 도시에 도착했는데 오히려 거기서 더 깊은 고민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이 긴 여정이다. 어딘가에 닿는 이야기가 아니라, 닿고 나서도 계속 가야 하는 이야기다.
같은 시기에 그린 ⟨길 잃은 레이서⟩가 꿈속의 숲을 다룬다면, 이쪽은 깨어 있는 동안의 도시다. 두 이야기는 나란히 진행됐다.
길은 원래 거기 있었다.
⟨Long Journey NO.5⟩ 앞에 서면 도시 한복판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세로로 선 화면이다. 검은 건물들이 양옆을 막고, 가운데에 오래된 돌다리가 걸려 있다. 그 다리 아래가 열려 있고, 흰 길이 하나 굽이치며 뻗어 나간다. 길 양옆으로 언덕과 나무가 보인다.
도시가 아니다. 도시 밖이다.
다리 위에는 부엉이가 앉아 있다. 날지 않고, 가만히. 오른쪽에는 등대가 서 있다. 바다도 없는 도시 한복판에 등대가 있다.
아래쪽에는 자동차 두 대가 앞모습으로 서 있다.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이 화면에서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 나갈 길이 보이고, 그 위에 새가 앉아 있고, 빛이 비추고 있다.

길이 안개로 물러났다.
⟨Long Journey NO.4⟩로 가면 같은 자리가 흐려져 있다.
같은 도시, 같은 다리인데 아래쪽이 뿌옇다. 안개가 찼고 그 안에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서 있다. 굽이치던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흐린 자리에 사슴 한 마리가 있다. 아주 작다. 도시 한복판에, 자동차들 바로 뒤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다.
이 그림에는 아직 색이 남아 있다. 노란 택시와 붉은 자동차가 앞모습으로 이쪽을 향해 온다.
저 흐린 곳이 어디인지 그림은 말해 주지 않는다. 지나쳐 온 곳일 수도 있고 지나가 버린 과거일 수도 있다. 강민석은 그것을 정해 두지 않았다. 보는 사람이 정할 몫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 그림은 여운이다. 뒤를 향해 열린 화면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
⟨Long Journey NO.6⟩은 이 연작에서 가장 크다. 가로가 194센티미터, 세로가 97센티미터. 옆으로 길게 누운 화면이다.
여기서는 자동차들이 등을 보인다. 세 대가 나란히, 저쪽으로 달려간다.
그 앞에 다리가 있고, 다리 아래가 열려 있다. 그런데 열린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 안개도 아니고 숲도 아니다. 그냥 하얗다.
⟨NO.5⟩에 선명하던 길이 ⟨NO.4⟩에서 안개로 물러났고, 여기서는 사라졌다. 같은 다리 아래에서 벌어진 일이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워진 것이다. 강민석은 이 자리에 도시와 다른 새로운 숲길을 그렸다가 흰색으로 덮었다. 자세히 보면 아주 희미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부엉이는 앉아 있지 않다. 다리 위에서 날개를 펴고 있다.

덮을 수밖에 없었다.
오래 들여다보다가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다. 답을 찾을 수 없어서 지울 수밖에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 자리는 미래였다. 그는 그 미래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었다. 믿음이 있고 운명이라는 것을 믿고 싶다고, 그래서 답을 찾으려 했다고 그는 말한다.
찾지 못했다.
이상향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이제 안다고, 그래서 괴롭다고 그는 말한다. 삶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으니까.
답을 못 찾았는데 길을 그려 놓을 수는 없었다. 그건 없는 답을 있다고 하는 일이다.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거기에 형상을 그려 넣었다면 오히려 보는 사람의 해석을 막았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길을 그려 놓으면 그 길이 답이 되고, 보는 사람은 그것을 받기만 하면 된다.
그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1962년에 움베르토 에코가 『열린 작품』이라는 책을 냈다. 그가 그 무렵 눈여겨본 것은 악보였다. 어떤 작곡가들은 곡의 순서를 정해 놓지 않고 연주자에게 넘겼다. 어느 대목을 먼저 칠지, 어디서 멈출지를 연주하는 사람이 고른다. 같은 악보에서 매번 다른 곡이 나온다.
에코는 그것을 열린 작품이라고 불렀다.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완성을 넘겨준다는 뜻이다.
강민석의 흰 자리도 그런 자리가 되었다. 다만 순서가 반대였다. 에코가 본 작곡가들은 열어 두기로 먼저 정했고, 강민석은 답을 못 찾아 열어 둘 수밖에 없었다. 방법이 아니라 사정이었다.
한 번 그렸다가 덮은 자리는 처음부터 비어 있던 자리와 다르다. 지운 사람만 아는 두께가 거기 있다.
바닥에도 길이 없다.
한 가지가 더 있다. 이 연작의 그림들은 바닥이 희다.
자동차가 달리는데 그 아래에 도로가 없다. 차선도 아스팔트도 없이, 흰 바닥 위에 자동차가 놓여 있다.
그냥 비워 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이미 지나온 길을 고르고 싶지 않았다고 그는 말한다.
같은 길을 골랐다고 해서 같은 데 도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은 그런 말이 흔하다. 누가 이렇게 해서 잘됐으니 너도 그렇게 하면 된다는 말. 그는 세상에 그런 답은 없다고 본다. 남이 낸 길은 그의 인생이 아니고 그의 철학도 아니다.
그래서 바닥을 비웠다. 길이 아니라는 뜻이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흰 터널도 같은 말을 한다. 그는 그것을 모험이라고 부른다.
1945년 가을 파리에서 사르트르가 강연을 했다. 거기에 한 청년 이야기가 나온다. 홀로 남은 어머니 곁을 지킬 것인가, 집을 떠나 싸우러 갈 것인가. 어느 쪽을 골라도 누군가를 버리는 일이었다.
청년은 답을 들으러 왔다. 사르트르는 주지 않았다. 당신은 자유롭다, 선택하라고만 했다.
정해진 답이 없다는 말은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짐이다. 아무도 대신 골라 주지 않고, 고른 뒤의 일도 전부 자기 몫이 된다.
강민석이 바닥을 비운 자리가 거기다. 길은 미리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면서 생긴다.
다만 한 가지가 다르다. 사르트르는 운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부 내 선택이고 전부 내 책임이라고 했다. 강민석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운명이라는 것을 믿고 싶어 한다.
한쪽은 텅 빈 앞을 혼자 감당하겠다고 했고, 다른 한쪽은 그 앞에서 자기를 밀고 가는 무언가를 느낀다.
가리키는 것은 이렇게 많은데.
⟨NO.6⟩에는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 유난히 많다.
등대가 있다. 빛이고, 길을 잃지 말라는 뜻이다. 오른쪽에서는 커다란 손이 화면 안으로 들어오고, 왼쪽 간판 위에도 손이 하나 있다. 천지창조의 맞닿은 두 손을 떼어 놓고 양쪽에서 같은 방향을 가리키게 한 것이다.
부엉이가 있다. ⟨NO.5⟩에서 다리 위에 가만히 앉아 있던 새이고, ⟨NO.2⟩에서는 아예 화면 앞으로 날아 나온다. 노란 눈을 뜨고 이쪽을 본다. 밤에 움직이는 새이고, 날갯짓은 시작이라는 뜻이라고 그는 말한다.
자동차는 세 대다. 왜 셋인지 물으면 경쟁이 아니라고 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건물 두 채와 그 사이를 잇는 다리가 겹쳐지며 터널 하나가 생긴다. 도시에서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통로다.
등대가 비추고, 두 손이 가리키고,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터널이 열려 있고, 셋이 함께 간다.
그런데 그 끝이 하얗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오래된 말이 있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뜻이다. 손가락은 달이 아니라 방향일 뿐이니까.
이 화면은 가리키는 것으로 가득한데, 가리켜진 것이 없다.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강민석은 요즘 옛 그림을 자주 꺼내 본다. 지금 작업을 하다 보면 자꾸 예전 것으로 눈이 간다고 한다. 그러다 이 그림 앞에 다시 섰다.
11년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멈추지 않고 그렸다. 사막을 그렸고, 캔버스를 뒤집었고, 충돌하는 두 대를 그렸다.
그러면 2015년에 비워 둔 저 자리는 이제 채워졌을까.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여전히 채울 수 없다고.
채워진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자리는 그대로인데 그 앞에 선 사람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11년 동안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저 방향이 옳은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가면 안 되는 길일 수도 있다고. 그러면서도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에게 그림이 그런 것이다.
이 연작은 열한 점이 전부다. 이야기를 너무 오래 고민해서 많이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중 한 점의 제목은 ⟨뒤돌아보지 마⟩이고 다른 한 점은 ⟨너에게 달렸어⟩다. 지나온 쪽을 보지 말라는 그림과 앞은 네 몫이라는 그림이 한 연작 안에 나란히 있다.
긴 여정이라는 제목은 도착을 말하지 않는다. 아직 달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가 덮어 둔 자리는 지금도 하얗다. 다만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 자리를 바꾸는 것은 자기 생각과 행동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니 비어 있는 동안 그 자리는 계속 열려 있다.
다리 위의 부엉이는 밤에 움직이는 새다. 어두울 때 날개를 편다.
그리고 그 앞에 서는 사람은 그 혼자가 아니다.
참고 자료
⟨긴 여정 Long Journey⟩ 연작 11점, 2014-2015, 혼합재료. 타이틀 작품은 ⟨Long Journey NO.6⟩(193.9×97cm, 2015). 본문에 함께 실은 작품은 ⟨NO.5⟩(130.3×89.4cm, 2015), ⟨NO.4⟩(116.5×72.5cm, 2015), ⟨NO.2⟩(72.5×91cm, 2014). 연작에는 ⟨뒤돌아보지 마⟩(91×50cm, 2014), ⟨너에게 달렸어 NO.1·NO.2⟩(2015), ⟨도전 NO.3⟩(53×100cm, 2014)이 함께 있다. 도시의 모티브는 뉴욕 타임스퀘어. 작가 노트 및 2026년 8월 작가 구술.
기법 — 디지털로 합성한 이미지를 캔버스 크기에 맞춰 조각으로 나눠 종이에 레이저프린트한다. 토너가 인쇄된 면을 캔버스에 엎어 놓고 열을 가해 붙인 뒤, 종이에 물을 적셔 뜯어낸다. 뜯긴 자리와 이미지가 남은 자리에 아크릴 물감을 묽게 풀어 오래 말리고, 마지막에 물감을 흘린다. 같은 시기의 ⟨길 잃은 레이서⟩도 같은 기법으로 그렸다.
장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6) — 1945년 파리 강연을 옮긴 책. 어머니 곁에 남을지 싸우러 갈지를 묻는 청년에게 답을 주지 않고 "당신은 자유롭다, 선택하라"고 말하는 대목이 실려 있다.
움베르토 에코, 『열린 작품』(1962) — 연주자가 순서를 정하는 악보를 예로 들어, 작품이 작가의 손에서 끝나지 않고 해석하는 사람에게서 완성된다고 본 책.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 선가에서 널리 쓰이는 비유. 가리키는 것과 가리켜진 것을 혼동하지 말라는 뜻.








